박사

박사가 되었다.

딱히 그렇게 느낌이 달라진 것은 없지만 뭔가 더 많이 자유로워진 느낌. 디펜스를 삼월 말에 마치고 이번 달 중순 쯤 졸업 논문 최종본을 제출했다. 학교에서 졸업장에 이렇게 찍힐 거다 하고 뭐라고 보내줬는데 닥터 오브 필로소피 이렇게 써 있어서 기분이 묘했다. 졸업을 하긴 했구나. 어차피 같은 연구실에서 계속 일하고 있고 졸업 논문 내기 전 해왔던 일을 계속 하고 있으니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넌 더 이상 학생이 아니야, 이렇게 주지하고 있다. 즉, 아카데미아에 존재하는 암묵적인 교수-학생 간 주종관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도 된다는 거고 (우리 교수는 다른 교수들에 비하면 천사에 가까웠다 하지만), 물론 좀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이런 의미.

아카데미아를 떠나기로 마음 먹고, 이전부터 관심 있었던 데이터 사이언스 쪽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가는 게 좋다고 생각돼 일단 온라인 강의를 들으면서 친구랑 같이 머신 러닝을 공부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졸업을 했다고 해도 막상 그렇게 널럴하지가 않다. 하지만 날씨도 점점 풀리고 일단 정신적으로 졸업 전처럼 그렇게 심한 압박감을 받지 않아서 그런지 마음은 참 편하다. 새롭게 배우는 것들도 그래서 그런지 더 즐거운 마음으로 접할 수 있게 된다.

지난 주에는 게이브를 보러 오스틴에 갔었다. 며칠밖에 안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교수가 새 직장을 구할 때까지는 자기 밑에서 일해도 좋다고 했는데, 어차피 논문만 쓰는 거라면 (실험을 더 할 필요도 없으니) 굳이 연구실에 나갈 필요도 없다. 그럼 굳이 뉴욕에 있지 않아도 원격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건데, 그렇다면 내가 과연 뉴욕에 왜 있어야 할까. 이제 날씨가 좋아지고 하니 뉴욕에 사는 맛이 좀 나겠지만, 내가 과연 여기서 얻는 게 많을까 잃는 게 많을까 생각해 봤다.

뉴욕에 있으면 제일 좋은 점은 사실 뭐 도시를 즐기고 이런 걸 떠나서 구직하기가 더 편하다는 것 – 아무래도 네트워킹하기가 더 쉬우니까. 오스틴에 있으면 좋은 점은… 사실 더 많다 – 장거리 연애를 끝내 접을 수 있고, 돈도 많이 아낄 수 있고. 차를 사지는 않을 테고, 아무래도 구직을 오스틴에 집중해서 해야 할 테니 이런 점이 힘들기는 하겠지만, 자전거를 타면 되고 아니면 집카Zipcar이런 걸 이용하면 되고, 그리고 잡 구할 때까지는 일단 앞으로 한 반 년 정도까지는 교수 연구실에 소속돼 있을 수 있으니 거취를 심각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의외로 쉽게 결정을 내렸다. 오스틴으로 가기로. 오스틴에 하도 자주 가서, 이사를 가더라도 아마 그전부터 쭉 살아왔던 것 같은 느낌이 들겠지. 지금 생각으로는 유월 말 즈음을 생각 중이다. 그 정도는 뉴욕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랑 작별 인사할 시간도 충분할 테고, 또 같이 공부하는 친구랑 스터디 마무리하는 것도 가능할 테고. 일단 오스틴으로 돌아가면 여러 모로 삶의 질이 향상될 텐데, 이 생각을 하니 즐겁다. 그리고 또 박사 과정이라는 삶의 한 장을 접고 다른 장을 시작하는 느낌이 들어서 뭔가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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